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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원야승(2) [ 2020.10.21 ]

[뉴스재팬=포사단필] 또라이와 박사

신입행원 K는 국제조세 분야를 공부한 법학석사로 은행에서 특채한 전문 인력이었는데, 그의 학위 논문은 이중과세방지협정에 관한 연구였다. 당시 뉴욕, 시카고, 로스엔젤리스 등지에 진출한 시중은행의 지점들은 미국 국세청(Internal Revenue Service, IRS)의 세무감사 강화 추세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K는 원만하고 개방적이어서 선임행원들과 잘 어울렸고 책임자들도 그를 아꼈다. 서열로 치면 가장 아래였기에 부서의 잡다한 일을 처리하면서 군말이 없고 언행이 명쾌했다. 자기 의견을 똑 부러지게 밝히면서도 붙임성 있게 말하는 남다른 강점으로  대화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가끔 여럿이 소주를 마실 때 그는 “삼포로 가는 길”을 불렀다.

부서 업무에 관한 기초를 익힌 다음 K가 본격적으로 해야 될 일은 당연히 국제조세 연구가 될 터였다. 그러나 비록 고급 인력으로 특채되었지만 자유로운 정신세계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그가 보수적인 은행 조직에 온전히 뿌리를 내릴지는 미지수였다. 이는 조직의 인력관리 차원에서 검토할 사안이었다.

입행 2년차였던 1991년 2월 초 K가 사고(?)를 쳤는데, 그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그가 전화를 받았는데 감독기관(기관))의 전화였다. 기관이 1월 31일 기준 국외점포(국외지점 및 현지법인)의 손익현황을 모레까지 보고하라고 요청했다. 시중은행의 국외점포 손익현황 보고는, 각 국외점포의 매월 말 현재 손익을 보고 받아 취합 후, 증감 원인을 분석한 다음 행내 보고 절차를 거친 뒤 기관이 정한 지침에 따라 익월 15일까지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K는 이 요구에 대하여 지침에 따라서 2월 15일까지 보고하겠다고 응답했다. 이에 기관은 민주자유당 실세 L 국회의원이 급하게 찾아서 우리도 어쩔 수 없으니 모레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K는 기관 지침에 명시된 기한에 맞춰 보고하겠으니 정 급하면 L 의원 명의의 공문을 보내라고 응수했다. 잠시 후 부장이 손익 담당 책임자를 급히 불러들였다.

이틀 후 오전에 담당 책임자는 서둘러 작성한 손익현황을 K에게 건네주면서 기관에 가서 공손히 드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기관에 들어간 K가 엊그제 전화한 당사자와 면담을 요청했으나 여직원이 그가 자리를 비웠다면서 자료를 두고 가면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여직원에게 자료를 넘긴 다음 돌아선 K가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보다 내가 L 의원을 더 잘 압니다, 필요하면 당장이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이 여차여차하니 국외점포 손익현황을 좀 일찍 보고해주면 좋겠다고 협조를 구하면 되지 치졸하게 외부 인사를 끌어들여 일을 재촉하다니, 기관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좀 도와 달라고 하면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바에야 다 도와드립니다. 그래야 우리도 편한 마음으로 기관에게 아쉬운 소리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서로 도와주고 도움 받는 게 세상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렇게들 살지 마십시오.”

기관은 기관다운 품위를 유지하라는 시중은행 신입행원의 일갈이었다. 나중에 기관의 전화를 받은 담당 책임자는 K가 도무지 대책이 없는 또라이라고 에두른 다음 너그러운 이해를 구했다.

그 자료가 L 의원에게 전달되었는지, 전달되었다면 어떤 정책 결정에 참고자료로 이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국회의원이 필요해서 자료를 요구했겠지만, 정작 의미 있는 자료는 1월 15일까지 보고 받은 1990년 말 결산 손익현황이었다. 영양가 없는 자료를 요구하는 측이나 그것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측이나 오십보백보였다. 

K는 1997년 8월 파생금융상품의 거래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모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4월 그는 은행을 떠나 준정부기관으로 자리를 옮겨 팀장으로 일하면서 금융에 관한 시야를 넓혔고, 다시 민간 연구소로 전직하였다. 그는 갑과 을을 거치면서 역지사지를 체득하였고, 현실과 이론을 아우르는 경력을 쌓은 뒤 보다 자유로운 세계를 찾아서 학계에 정착하였다.

요즈음 국정감사로 국회 안팎이 시끄럽다. 국회의원들은 대목장을 만난 듯 버릇대로 잡살뱅이 자료까지 조속히 제출하라고 독촉하니 서류는 높이도 쌓이겠다. 감사하는 국회의원들마저 자기들 입으로 맹탕감사라고 자조하는 말을 듣게 되니 이런 속담이 떠오른다. 

“아무리 사당을 잘 지었기로 제사를 못 지내면 무엇 하나.”

전영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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